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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예 -

독보적인 음색 가수 심수봉에 대해

by 『Moongchiⓝⓔⓦⓢ』 2023. 3. 16.

본명
심민경 (沈玟卿)
출생
1955년 8월 28일 (67세)
충청남도 서산시
국적
대한민국
본관
청송 심씨
신체
O형
부모
아버지 심재덕, 어머니 장형복
형제자매
언니, 이부 남동생 1명, 이부 여동생 1명
배우자
김호경
자녀
2남 1녀
학력
인화여자고등학교 (졸업)
명지대학교 (경영학 / 학사)
종교
불교  개신교(침례회)
직업
가수, 아티스트
소속사
라이트웨이브 엔터테인먼트, 루체 엔터테인먼트
데뷔
1978년 MBC 대학가요제 '그때 그 사람'

대한민국 가수. 트로트와 발라드, 그 중간의 간극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메운 트롯발라드의 선구자.

 

비음을 잘 쓰는 가수로 유명하다. 피아노,드럼연주 실력이 상당하며, 방송에서도 곧잘 솜씨를 선보이곤 했다.

 


트로트 가수이지만 보기 드물게 싱어송라이터의 면모도 가지고 있는 가수로 그녀의 히트곡들은 거의 대부분 그녀가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들이다. 보통 유명한 트로트 가수더라도 자기 스스로가 곡을 써서 부르기 보다는 유명 작곡가의 곡을 받아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심수봉은 상술됐다시피 이미 악기를 다루는 능력부터 먼치킨스러우니 자기 스스로가 곡을 쓸 수 있는 능력이 된다. 그러다보니 심수봉의 곡은 단순 트로트 곡이 아닌 것이다. 여타 트로트 가수를 뛰어넘는 그야말로 '아티스트'다.

심수봉의 대표곡으로는그때 그 사람,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사랑밖엔 난 몰라, 여자이니까, 백만송이 장미, 미워요, 비나리, 무궁화, 나의 사계절, 나의 신부여 등이 있다. 후배가수들도 심수봉의 곡을 많이 리메이크 하지만, 아무리 다른 가수가 리메이크 해도 심수봉의 원곡을 뛰어넘는 것은 무리라는데에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백만송이 장미》는 러시아 가요를 번안하여 히트를 쳤다.

 

 

10.26 사건과 그 이후

1979년 10월 26일, 심수봉은 모델 신재순과 함께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의 술자리에 불려갔다. 이날도 평소와 별 다를 게 없었을 술자리였을지도 몰랐으나 김재규가 차지철과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면서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다.

왼쪽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이 심수봉이고, 오른쪽은 신재순이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합동수사본부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강도 높게 조사하면서 그녀도 조사를 받았고 현장에 있던 것뿐이었던지라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시대는 그녀를 파란으로 몰고 갔다. 방송 활동이 금지되고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던 그녀는 잠시 영화배우로 활동해 "아낌없이 바쳤는데"라는 영화의 주연으로 캐스팅되기도 했지만 가수로서는 활동할 수 없었다.

1984년이 돼서야 방송 활동 금지가 풀리면서 그녀의 또 다른 대표 곡인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히트 치면서 다시 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 발표한 《무궁화》가 국민을 선동한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방송된 지 단 하룻 만에 금지곡이 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1987년에는 "사랑밖엔 난 몰라"가 히트했고 이후 꾸준히 콘서트와 음반 발매를 하면서 현재까지 가수로서 활동하고 있다.

1993년 SBS 주병진 쇼에 출연해 암살 당시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얘기한 적 있다. 영상을 보면, 박정희에 대해서는 좋게 묘사하지만 본인이 이래저래 수모를 겪은 시절의 대통령인 전두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언급을 강하게 하는 편이다.

 

어린시절

1955년 8월 28일에 충청남도 서산군(現 서산시)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음악을 했던 집안이었고, 아버지, 큰아버지, 고모 등도 모두 음악을 했을 정도로 후덜덜한 음악가 집안이었다. 이런 집안의 환경 속에서 그녀도 음악인의 삶을 걷게 된다. 주 전공은 재즈였는데, 최고의 음악가들만 설수있다는 미8군 무대에 로큰롤 밴드 "논스톱"의 드러머로 서기도 했었다. 그녀를 트로트 가수로만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드럼을 치는 모습에 깜놀하기도 했는데 이런 뒷배경이 있었기 때문. '드럼을 치는 여성 보컬리스트'로 카펜터즈의 캐런 카펜터와 함께 이야기되기도 한다.



한편, 심수봉은 당초 서산초등학교를 다녔으나, 그녀의 어머니가 이혼 후 이사하게 되자, 어머니를 따라 2학년 때 서울 은로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 후, 영등포에 있던 여중에 입학했으나 입원 치료를 위해 또다시 2년 휴학을 했다. 뒷날 인천 인화여자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여 만 19세인 1974년에 고교 졸업을 하였다.



심수봉은 같은 해 만 20세의 나이로 대입준비를 하여 재수 끝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도중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했다. 당시 영상 보기 당시 대부분의 대학가요제에 참여하는 대학생들의 음악적 성향이 포크나 록이었던 시절에 심수봉은 자신의 주 전공인 재즈가 아닌 트로트로 도전장을 던졌으나 상을 받지는 못했다. 심사위원이 좋은 점수를 안 준 이유는 '너무 프로스러워서'였다. 지금이야 이해하기 힘든 평이지만 당시 대학가요제의 심사기준은 대학생의 풋풋함이었기 때문에 심수봉의 세련된 음악과는 상당히 간극이 컸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1회 대상 수상자 자격으로 게스트 출연을 했던 여병섭(샌드페블즈의 보컬리스트)이 수상 발표 때에 대기실에서 심수봉 옆에 있었기에 표정을 볼 수 있었는데, 금상까지 자신의 이름이 발표되지 않자 대상이라고 확신해서 오히려 더 기뻐했다고 한다.

음악을 들어보면 피아노와 보컬만으로 빅밴드를 압도할 뿐 아니라 악단은 화성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굴욕을 보인다. 여병섭에 따르면, 악단의 연주 실력 때문에 생긴 사고가 아니라 편곡 과정에서 생긴 불상사였다. 악단이 준비한 편곡이 불만이었던 심수봉이 공연 시작 전까지 악단장과 말싸움을 했다고 한다. 결국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하고 각자 알아서 공연에 임하다 보니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 대학가요제에서 부른 《그때 그 사람》이 히트하면서 가수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때 그녀와 겨뤘던 출연자들이 후덜덜한데 임백천, 노사연, 배철수 등이다. 이들은 대상은 못 탔으나 다들 이후에 가수로 데뷔했다. 대상은 부산대학교 중창단 썰물이 수상했고, 노사연이 금상, 배철수가 소속된 그룹 활주로가 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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