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군사반란 사태는?
198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육군 내의 불법 조직인 하나회의 일원인 전두환이 주도하여 발생한 사건은 제5공화국의 실질적인 시작이다. 이 사건은 주로 12.12 사태 또는 12.12 사건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김영삼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을 통해 반정부 군사 쿠데타로 재정의되었고 공식적으로는 12.12 군사 반란으로 불리게 되었다.
원인
1979년 10.26 사건 이후 새벽 4시 김재규가 체포된 후 국방부 회의실에서 각료들은 서둘러 비상조치를 내렸다. 이에 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었던 신현확은 대통령이 서거했고 그 범인은 김재규였다는 것을 알리며, 국가적 위기 상황에 국가원수직이 비어있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에 의하면 대통령 유고 시 국무총리가 승계하도록 돼 있으니, 지금부터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로 인한 계엄의 선포로 인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통령 권한대행과 함께 정국을 이끌게 되었다.
하나 최규하는 이때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최규하는 권한 대행 수락 당시 "지금 이 순간부터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겠다."라고 전국 계엄이 아닌 부분 계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 조치는 사실상 최규하 스스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의 군 통제권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왜냐하면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지면 총 책임은 대통령이 맡게 되지만 일부에 한해 계엄령이 내려지면 국방부 장관이 총 책임을 맡게 되기 때문이다.
원래 최규하는 정치에 휘말리기를 싫어했기에 정치적 부담감이 크다고 판단하여 제주도를 제외하고 계엄을 선포해버렸다. 이 때문에 계엄령 이후 '계엄사령부'가 유일한 권력의 중심이 되었고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수사 총책을 맡은 전두환이 더더욱 권력의 핵심으로 부각됐다. 거기에 국방부 장관이었던 노재현은 그릇이 부족한 사람이었고, 전두환과 각별했던 사이였기에 훗날 정승화와 전두환이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도 전두환을 두둔하기에 바빴던 인물이었다.
그 와중에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는 철저한 원칙론자로, 정치에 휘말리기 싫어서 권력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스스로 막았다. 실제로 권한대행 당시에 정승화가 계엄사의 업무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자, 지금은 전국 계엄이 아니라 부분 계엄이니 자신한테 보고하지 말고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라 할 정도로 정치에 무관심했다. 이로 인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어 10.26 사태 수사를 총괄하게 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군부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된다. 그리고 계엄사령관 정승화 입장에서 전두환은 곧 숙청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이미 전두환을 위시한 군내 비밀 사조직 하나회는 전두환의 동기생들인 육군사관학교 11기 출신들을 주력으로 서로 상부상조하여 군부 내의 요직을 하나 둘 차지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는 기존에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기존 군부세력을 위협할 만한 수준으로 군 내부에서도 이들에 대한 권력 집중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또한, 기존에 정보활동을 하던 대통령경호실의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의 김재규가 동시에 무력화되면서 사실상 제대로 된 기능을 하는 정보기관이 보안사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정보력이 국군보안사령부로 집중된 것도 전두환의 세력이 강화된 주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더욱이 전두환은 당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었으므로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합법적으로 자연스럽게 중앙정보부와 검찰, 경찰, 군검찰 등 모든 정보·수사 기관들을 지휘 및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자신이 사실상 독점하게 된 정보력과 수사력을 이용해 전두환은 정치인들의 이러저러한 비리를 캐내어 이용하거나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10.26 사건의 수사 내용을 임의로 편집하여 보고하는 등, 정국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유도하고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망각한 채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정치에 관여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전두환은 10.26 사건 다음날 사건 수사를 빙자하여 윤일균 중앙정보부 제1차장 겸 부장 직무대리, 오탁근 검찰총장, 손달용 치안본부장 등을 보안사로 불러들여 국가원수 시해 책임을 물어 당신들을 다 잡아들여야 하지만 자신에게 협조하면 체포하지 않겠다는 압박을 하면서 사실상 자신 편으로 끌어들였다. 이에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헌병, 군검찰을 장악한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심지어 정부 각 부처 차관들을 불러들인 후 사실상 대통령인 양 굴기까지 했다.
이러한 내용은 당연히 정승화에게도 보고되었고 정승화는 직접 전두환을 불러 "당신은 군인이지 정치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대통령인 양 굴지 말라고 충고했을 정도였다. 한편 전두환은 김계원(박정희 비서실장)을 조사하던 중 김계원의 집에서 약 9억 원 정도의 수표 뭉치를 발견하게 된다. 전두환은 이 돈을 먼저 박근혜에게 6억 원을 전달하고 노재현에게 5천만 원을 전달했다.
참고로 당시에 직장인의 월급이 평균 10만 원, 서울 아파트 1채 값이 1000만 원이던 때였다. 2023년 평균 월급이 350만원 가량으로 저 당시 9억은 지금 화폐가치로 300억이 넘는 돈이었다.
마지막으로 정승화에게 2억 원을 전달하려 했으나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핀잔만 들었다. 정승화는 이런 전두환의 월권에 화가 나서 노재현에게 전두환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뇌물을 받은 노재현은 전두환을 옹호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정승화는 노재현을 찾아가 전두환을 처벌해야 한다고 계속 요구했고, 특히 사조직이 군의 기강을 다 망치고 있다는 생각에 인사 개편을 통해 하나회 장교들의 기세를 꺾어놓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참고로 노재현은 국방부 장관 2년차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국방장관 공관에 있던 노재현은 인근의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나자 기겁하여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그 즉시 가족과 함께 공관에서 빠져나와 단국대로 허겁지겁 도망친다.)
이에 정승화 총장은 전두환을 보안사령관 겸 합수부장 직에서 쫓아내기 위해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보직 이동시킬 것을 계획하고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과 상의했고, 하나회의 인사들을 군 핵심부 요직으로부터 밀어내어 제거하려는 계획을 은밀히 세운다. 그리고 당시 강직하고 청렴한 참군인으로 평가받던 갑종 출신인 장태완 소장을 수도경비 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 하나회 측의 불온한 움직임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조치들도 서두른다.
노재현 장관은 전두환 보직 이동에 관한 정승화 총장의 계획을 김용휴 국방차관에게 알렸고, 김용휴는 이를 전두환에게 전달했다. 보안사의 정보력과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군부에 거대한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던 하나회 측이 정승화의 계획을 매우 빨리 감지한 것. 요직이란 요직은 모두 하나회가 장악했고 더욱이 당시에는 누가 하나회인지 정확히 알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정승화의 움직임은 이런 사조직의 인맥을 통해서 속속 전두환 측에 전해졌다.
계엄사령관 체포 계획
절대로 그냥 당할 생각이 없었던 전두환과 하나회는 정승화 총장보다 한 발 빨리 움직여서 정승화가 박정희 시해 사건 현장에 있던 것을 구실로 정승화를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운다. 전두환은 10.26 사건 당시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와 한 패였다고 주장하면서 정승화 총장을 체포할 구실을 만들었고, 하나회 조직원들과 함께 모여서 1주일 만에 12월 12일에 작전을 실행하기로 결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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