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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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10일 ~ 6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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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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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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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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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부의 독재로 인한 민주 세력과의 묵은 갈등
4.13 호헌조치 발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및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 등 |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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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헌철폐 및 직선제 개헌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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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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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만 명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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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당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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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민주정의당 |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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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전두환
민주정의당 대선 후보 노태우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 상임고문 김대중 이한열 열사 박종철 열사 |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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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선언 발표,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 개헌
대한민국 제6공화국 출범 |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
(護憲撤廢! 獨裁打倒! 民主爭取!)
종철아! 잘 가라… 아버지는 아무 할 말이 업데이…
종철이를 살려내라! 한열이를 살려내라!
6월 항쟁이란?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에 맞서 전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민주화 운동을 지칭하는 단어로, 6월 항쟁, 6월 민주항쟁, 6월 민주화 운동, 6.10 항쟁 등의 이름으로도 불린다. 보통 “6월 민주 항쟁” 또는 약칭인 “6월 항쟁”이라고 불린다.
1987년 4월, 전두환은 남은 임기가 1년도 안되어 임기 중의 개헌이 불가능하니, 현행 5 공화국 헌법대로 차기 대통령선거를 치르고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특별 담화로 대통령 간접 선거 조항을 사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는 가뜩이나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열망하던 사람들의 반발을 끌어냈다.
당시 대다수 국민은 직선제로의 복구를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 선언을 계기로 제도권 야당과 재야 민주화 세력들은 연합전선을 구축하였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기 위한 국민운동본부를 창설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시작된 권위주의 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서구 수준의 자유민주주의가 쟁취되었다.
6월 항쟁의 의의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헌법과 정권의 개혁안을 발표하게 만든 사건으로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와 자유화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9차 개정안이 지금까지도 1987년 체제라고 표현될 정도로 한국 정치, 법률 운영의 기초가 되고 있다.
또한 다른 민주 혁명과는 다르게 비교적 평화적인 시위로 군부 독재 정권을 쫓아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이 평가받는 시민 항쟁이기도 하다. 시민 항쟁이 일어나면 대개 공권력의 폭력 남용에 의한 내란, 쿠데타, 폭동 등의 유혈 사태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지만, 6월 항쟁은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할지언정, 전반적으로 치안은 양호했다. 당시 취재를 나선 외신 기자들도 이 점에 대해 칭찬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 민주주의 역사의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6월 항쟁은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과 함께 시민들의 힘(People's Power)으로 민주화를 쟁취한 이른바 '제3의 민주화 물결'의 대표적인 예로 거론된다.
결정적 원인 1 : 박총철 고문치사 사건
1986년 인천 5.3 운동과 10.28 건대항쟁의 실패 이후 5공 정권의 엄혹한 민주화세력 탄압으로 정국은 얼어붙었다.
그러나 반전의 계기를 가져온 건 1987년 초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일명 '탁 치니 억'이었다. 당시 운동권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한 경찰들이 그에게 물고문을 가한 끝에 박종철이 사망하자 경찰은 물고문 사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갖은 공작을 펼쳤다. 그래서 생겨난 희대의 망언이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더라이다. 경찰의 발표는 "심문 과정에서 실토하라고 책상을 내리쳤더니 심장마비로 억 하고 죽었다"는 것이었고, 이를 당시 언론에서 기사로 다루며 헤드라인으로 뽑아낸 문구가 바로 저 망언이다.
그런데 박종철 사망 후 부검을 실시해 본 결과 박종철의 시체는 수많은 피멍과 물고문, 전기고문의 흔적들이 역력했고 당시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정식으로 확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국민들은 분노의 표시로 경적을 울리는 경적 시위를 하기도 했다. 결국 고문 경찰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두환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개헌 논의는 곧 있을 1988 서울 올림픽 끝나고 하자"는 말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묵살했고, 국민들의 민심은 격앙되었다.
이때는 1980년에 대대적으로 체포되었던 신민당 출신의 정치인들이 5년 만인 1985년에 다시 대거 사면되고 이들이 다시 신한민주당을 구성해 총선에서 제1 야당의 자리를 차지한 이후의 시점이었다. 1985년부터 야당은 대통령 간선제 안에 대해 "헌법 개정 1000만 人 서명 운동"을 추진하는 등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여당에서도 이를 무시할 수 없어 대통령 간선제안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던 시점이었다.
민정당과 신민당 두 당이 제시한 개헌안의 내용은 구체적으로는 매우 달랐다. 여당인 민정당은 의원 내각제를 주요한 내용으로 삼은 반면 야당인 신민당은 대통령 중심제를 추구했다. 어째 여야 입장이 뒤바뀐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야권의 기세가 올라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가 벌어질 경우 대통령 중심제에 의해 가해질 충격이 더욱 크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여권에서 대통령의 권한이 비교적 약한 의원 내각제안을 추진한 것이다. 이에 신민당 총재 이민우가 호응하는 이민우 구상이 나오면서 신민당은 대분열, 결국 김영삼, 김대중 세력이 일거에 탈당하여 새로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대통령 취임 때부터 "7년 임기를 마치면 무조건 떠나겠다"라고 약속해 온 전두환은 퇴임 이후에도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의원내각제 개헌을 구상하고 있었다. 국회의원 공천권을 가진 집권당 총재로 후계자 노태우를 바지사장으로 세워서 좌지우지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큰 틀에서는 개헌을 위한 위원회가 여야의 만장일치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가 호헌 조치로 이 논의 자체를 뒤집어 버리자 직선제 개헌으로의 변화를 고대하던 국민들의 반발을 한 번에 받게 되고 만 것이다.
결정적 원인 2 :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
그런 와중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마티아 신부가 5.18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은폐되었고 고문경찰은 모두 5명이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상승했다.
이 발표된 과정이 매우 극적이었다. 당시 고문치사 사건 주범들은 사건 축소, 은폐로 자신들이 모든 죄를 뒤집어쓴 것에 대해 억울해하며 감방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이것을 우연히 근처 방에 수감 중이던 재야민주화운동가 이부영이 듣게 되어 교도관에게 문의했더니 "박종철 사건이 은폐조작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흘러나온 것. 이부영은 이에 크게 분노하여 관련 내용을 휴지에 써서 다른 교도관을 통해서 외부에 내보냈고, 이를 받은 김정남 전 수석이 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하여 발표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사건이 축소 조작되었음이 새롭게 밝혀지자 경찰과 정부의 도덕성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여론은 폭발했고, 야당과 재야운동권은 고문 살인 은폐 조작을 규탄하는 대규모 대회를 열었다. 5월 27일 향린교회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가 결성되어 그간 분열되어 있던 민주 세력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본은 6월 10일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날에 맞춰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를 규탄하는 집회를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기로 했다.
또한 각 대학에서도 시위의 열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5월 말, 학생들이 뭉쳐 종로로 나왔다. 이날 시위에는 이전과 달리 일반 학생들의 참여가 크게 늘었다. 그뿐만 아니라 종로에서 학생들이 단체로 드러누워 집회를 하다 경찰이 체포하려 하자 시민들이 항의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6월 초, 국본은 서울시내에 약 20만 장의 전단을 뿌려 집회 사실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결정적 원인 3 :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
그리고 6월 9일. 전국 각 대학 학생들은 10일 집회 하루 전, 각 대학 교정에서 사전집회를 연다. 연세대학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천여 명이 노천극장에 모여 사전 집회를 진행했다. 당시 학생들은 '전두환-노태우 화형식'을 끝낸 후 교문 앞으로 진출하면서 사건이 발생했다. 교외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에게 경찰들은 최루탄을 발사했는데, 규정을 무시하고 직사로 사격한 최루탄이 연세대생 이한열의 후두부에 직격 한 것이다.
이한열은 쓰러졌고, 같은 학교 도서관학과 학생 이종창이 겨우 부축해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호송됐다. 그리고 피 흘리며 쓰러진 이한열을 이종창이 힘을 다해 부축하는 장면을 당시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인 정태원 기자가 담아냈고, 이 사진이 뉴욕 타임스 1면과 중앙일보에 보도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이종창과 이한열은 이 집회 이전까지는 서로 전혀 몰랐던 사이였다고 한다.
당시 중앙일보는 적당한 사진을 찾지 못해 당시 사진을 찍은 로이터 통신의 정태원 기자에게 연락을 했는데, 당시 정태원 기자는 출근을 하지 않아 정태원 기자의 서랍에 있는 사진들을 가져가라라고 해서 문제의 사진을 가져갔고, 조선일보에 난 사진 말고 이 사진을 편집국에 가져갔다. 그 후 편집국 일부에선 데모를 유발할 위험성이 큰 사진이라며 말렸으나, 이창성 사진부장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을 해 암묵적으로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준비를 각오하고 사진을 키워 신문에 게재했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사진부장에게는 다행히도, 이 당시 상황이 워낙 긴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정작 보안사령부조차 그를 끌고 가 고문을 할 틈이 없었다. 언론사 간부를 불러 갈굴 생각을 하는 것보다 시위대가 계속 불어나 막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6월 10일 자에 학우들에게 들려져 병원으로 후송되는 사진이 올라왔고, 그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버스에서 정태원 기자의 사진을 본 최병수 작가는 바로 그날 밤 연세대 총학생회로 달려가 판화 제작의사를 밝힌 뒤 '한열이를 살려내라'라는 문구를 담은 목판화를 제작하였고, 이는 보도 다음날 스카프와 손수건 등으로 만들어져 시위 참여자들에게 배포되었다. 연세대 학생회관에는 목판화를 확대한 대형 걸개그림이 걸렸다.
이 사진은 전두환 정권의 호헌조치의 종지부를 찍는 촉매제로 작용했으며, 훗날 AP통신 선정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에 선정됐다.
한편 연세대학교에 경영학과 학우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뇌사상태가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학교 전체가 뒤집혔다. 예비역 출신부터 과격한 시위를 벌이는 운동권에 반감을 가지던 학생들까지 모두가 뭉쳐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을 지키러 나섰다.
당시엔 이런 식의 과도한 공권력 사용으로 인해 사망한 자들의 시신을 경찰이 탈취해 강제로 부검한 뒤 사망원인을 조작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은 민주화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1991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시신 탈취 사건과 2016년의 백남기 농민 시신 부검 논란도, 적어도 유족들과 민중총궐기 당사자들에게는 이러한 의도로 비치고 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외에도 대회 당시 두 명의 대학생이 경찰의 구타 끝에 사망한 사실이 있었다.
1960년 4.19 혁명 당시에도 이와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김주열, 이한열 모두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으며, 이를 기점으로 범국민적 시위로 확산되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결국 역사는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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