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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6월 항쟁의 진행 상황 정리 / 지역별 시위와 모인 장소(원인과 결과)

by 『Moongchiⓝⓔⓦⓢ』 2023. 6. 7.
날짜
1987년 6월 10일 ~ 6월 29일
장소
대한민국 전역
원인
전두환 정부의 독재로 인한 민주 세력과의 묵은 갈등
4.13 호헌조치 발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 등
목적
호헌철폐  직선제 개헌 요구
참여 인원
200만 명 이상
시위 당사자
대한민국 국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민주정의당
주요 인물
대통령 전두환
민주정의당 대선 후보 노태우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 상임고문 김대중
이한열 열사
박종철 열사
결과
6.29 선언 발표,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 개헌
대한민국 제6공화국 출범

 

 

 

6월 10일, 본격적인 항쟁의 시작

6/10 대회 결의문(1987.6.10.)

첫째, 이 땅에서 권력에 의한 고문, 테러, 불법 연행, 불법 연금 등 여하한 인권 유린도 영원히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국민적 요구이다.

셋째, 정치 군부 세력의 몇몇 핵심자들끼리 독재 권력을 무슨 사유물인 것처럼 주고받으려는 음모에서 비롯된 이른바 4.13 호헌 성명이 무효임을 선언하며, •••••• 범국민적 운동을 더한층 가열할 것임을 결의한다.
-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

 

6월 10일에는 "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는 대규모 시위가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렸다. 이 시위에는 학생만이 아니라 당시 30대 화이트칼라 직장인들, 속칭 "넥타이부대"가 대거 참여하였다. 다수의 시민이 참여한 것은 박종철, 이한열의 사망과 같은 인권유린 사건이 그들의 정치의식을 크게 자극하였기 때문이다.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이에 정부는 집회를 봉쇄하기 위해 별짓을 다 했다. 12시에 선언문 발표가 예정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을 수일 전부터 봉쇄했으며, 당일 차량 경적시위에 동참할 것을 우려해 "경적을 울리는 모든 차량운전자는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잡아넣겠다"라고 뉴스를 통해 으름장을 놓았으며 서울 시내버스와 택시의 경적을 제거했다. 또한 수도권 전철은 시내 구간을 무정차 통과했으며, 단축 수업, 조기 퇴근 등 수많은 조치가 나왔다. 또 봉쇄된 곳도 미리 또는 담을 넘어 어찌어찌 진입한 사람들에 의해 12시에 사전 집회를 개최했으나, 경찰의 원천 봉쇄로 국본의 간부들이 체포되었고 집회도 확산되진 못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후일담에 보면 이러한 조치 때문에 도리어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 봉쇄되자 학생들 사이에서는 당일 12시 명동으로 모이라는 전언이 있었고, 12시 조금 넘은 시간에 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명동제일백화점 앞에서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1987년 신동아 7월호 참고) 1000여 명 이상이 운집한 집회를 해산시키려 경찰이 진압을 시도했지만 시민들은 주동자를 보호하며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고, 늦은 시간까지 집회를 계속하였다.

 

당시 명동일대

 

제일백화점 앞으로 복귀하지 못한 시민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유사한 성격의 작은 집회를 만들어 냈다. 명동 성당에서 롯데백화점 일대에는 시위집회 참여 인원이 점점 늘어났다. 여기에는 경찰의 원천봉쇄조치가 한몫했다. 직장인 입장에서는 회사는 조기 퇴근으로 일찍 끝났는데, 지하철 무정차로 집은 못 가고, 서머타임으로 인해 날은 밝으니 자연스레 시위대에 합세할 환경이 갖춰진 것. 당시 시대 상을 그린 만화 <100℃>에서는 조기 퇴근한 직장인들이 "이거 시위에 참가하라는 국가의 명령이겠지?"하고 집회를 막으려고 애쓰는 정부의 멍청한 대응을 비웃는 모습이 나온다.

서울주교좌성당 저녁 만도 종소리

 

그리고 6월 10일 저녁 6시, 서울시내 곳곳에서 집회가 일어난다. 국본의 방침대로 저녁 6시에 서울주교좌성당 저녁 만도 종소리를 필두로 하여 차량 경적을 신호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 경찰이 시위대들을 보이는 대로 체포하는 가운데 일부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피신하면서 소위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작되었다. 시위가 이미 5월 이전부터 진행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6.10 항쟁', '6월 항쟁'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건당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내용을 MBC 뉴스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땡전뉴스였던 당시 사정상 제1헤드라인이 민정당 전당대회 소식이고 이를 10분 넘게 보도하고 있다. 시위 소식은 3~4 꼭지 뒤에 "서울 시내 몇몇 곳에서 소요가 있었지만 큰 충돌 없이 끝났습니다."라고 언급한다. KBS 9시 뉴스 역시 내용은 마찬가지였다.


한편, 이 시기는 제16회 대통령 배 국제축구대회가 한창 진행되었던 시기였다. 경상남도 마산시에 있는 마산종합운동장에서 이날 오후에 태국과 헝가리 축구대표팀 간의 경기를 한 뒤, 이어서 열린 한국 A팀과 이집트 간의 경기가 치러졌는데 경기 도중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쏜 최루탄 연기가 경기장으로 날아들었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산발적인 시위가 매우 많이 일어났기에 최루탄에 익숙했던 한국 선수들과 관중들은 큰 동요가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집트 선수 중 다수가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그 사이에 한국 선수들이 골을 넣었기는 했지만 이집트 선수들이 지속적으로 이상을 보이자 한국 선수들과 관중들도 웅성웅성거렸고 결국 주심은 해당 경기를 재개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몰수무를 선언하며 경기를 종료시켰고, 이 장면은 KBS 1 TV를 통해서 갑자기 방송이 끊기는 초대형 방송사고까지 겹쳐 전국적으로 생중계되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경기가 끝나자 경기 전에 강제로 표를 사야 했던 마산 관중들이 표 환불을 요구하며 주최 측에 대거 항의하다가, 표 환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시위대에 합세하며 심야 시간까지 시위를 벌였고 전두환의 사진은 불탔다. 이 소식은 다음 날에 주요 언론들을 통해 짤막히 보도되면서 대중들에게 시위가 심상치 않다는 점을 널리 알린 셈이 되었던 것이었다.

 

 

명동성당 항쟁

 

시위대가 피신한 명동성당에는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있었는데, 김수환은 자신의 입지를 활용해 시위대를 잡으려는 경찰을 막아주었다.

 

수녀들이 나와서 앞에 설 것이고, 그 앞에는 또 신부들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 맨 앞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밟고 신부들을 밟고 수녀들까지 밟아야 학생들과 만날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 

 

 

추기경이 거부하는 상황에서 주교좌성당이자 한국 가톨릭의 상징인 명동성당에 함부로 경찰을 투입해서 사람을 잡아간다는 것은 세계 가톨릭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철통 같은 국가 권력이라 하더라도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전두환이 벌인 최대의 축제인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자칫 유럽이나 남미의 가톨릭 국가들이 올림픽을 보이콧을 할 가능성도 높았다. 실제로 교황청은 명동성당 내로 공권력이 투입되거나 시위 진압에 군이 동원될 경우 서울 올림픽에 대한 전면적 보이콧을 검토했다고 한다. 이게 현실이 되었다면 1988 서울 올림픽은 그대로 물거품이다.

 

결국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할 수 없게 되었다. 명동성당과는 다르게 6월 항쟁의 진원지인 서울주교좌성당은, 성공회가 영국의 국교이고, 바로 뒤에 주한영국대사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난입하여 대성당의 성물 등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서울교구 사제단이 10일간 단식투쟁에 돌입하였고, 전국의 모든 성당에서는 사제와 대성당을 위한 기도가 봉헌되었다.

 

1987년 6월 명동성당에 모인 시민들이 '민주헌법 쟁취하여 민주정부수립' 현수막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
 

 

국민들은 명동성당 안의 시위대에게 호응하면서, 성금의 형식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보내주는 등 지지를 표시했다. 여담으로 명동성당 농성 당시 조영래 등 인권 변호사들이 시위대와 합류하기 위해 명동성당에 접근을 시도하였는데, 양복 정장을 착용한 변호사들의 복장을 경찰들이 정부 관료로 오인하여 처음에는 달리 제지하려 들지 않았다. 하나 곧 상황을 파악한 경찰들은 재빠르게 접근을 막아세웠고, 변호사들의 접근 시도는 불발에 그쳤다. 당시의 변호사들이 남긴 회고록 등에 나오는 이야기.

 

 

6월 항쟁의 진행

서울이 심합니다. 광주는 조용히 넘어갔습니다.
- 6월 13일, 대통령 주재 관계기관 대책회의. 내무부 장관 고건


6월 11, 12일은 데모가 가속화하다가 13일은 절반으로 감소되었습니다. 월요일(15일)에 12일 정도의 많은 사람이 데모에 나와도 경찰 능력으로 진압할 자신이 있습니다.
- 6월 14일, 대통령 주재 비상대책회의. 내무부 장관 고건

 

6월 10일의 대규모 시위로 일순 긴장 상태가 이어졌지만 13일~14일의 주말이 찾아오면서 시위가 소강상태에 이르렀고, 가장 우려했던 광주가 대학생보다는 광주 종교계 쪽이 주도를 했다.

 

 

기독교인 천주교, 개신교는 물론이고 10.27 법난으로 정권에 비교적 순응적이었던 불교계까지도 가세했는데 광주 불교계를 분노하게 한 것은 5월 18일, 5.18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법회가 열리고 있던 금남로 근처 원각사에 전경 60여 명이 대웅전까지 난입해서 최루탄을 터트리고 학생들을 연행하는 일을 벌인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비교적 조용함에 따라 청와대는 자신감을 회복했다. 이 자신감과 내각 내 온건파의 주장으로 치안 당국은 명동성당 농성자들에게 성당 농성을 중단하면 아무도 구속하지 않고 무사 귀가를 보장한다고 약속했으며, 농성자들은 찬반 투표 끝에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농성을 중단했다. 다행히 치안 당국의 약속은 지켜졌다.

1987년 광주 금난로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판이었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자마자 주말 시위가 소강상태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인파가 다시 거리로 몰려왔다. 특히 지역의 주요 대학가들은 일제히 6월 15일을 신호탄으로 하여 본격적인 시위를 시작했다. 고건이 특별히 언급할 정도로 신경 썼던 광주도 마찬가지였다.

 

애당초 광주 대학가가 조용했던 이유는 전남대학교는 학교 축제로, 조선대학교는 학내 민주화 문제로 6월 10일 직후에 시위를 벌일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주말이 끝나자마자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는 항쟁 첫 주에 적극 가담하지 못한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가장 격렬하게 항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울에서도 명동성당 농성자들이 안전하게 귀가하는 것을 본 학생, 시민들은 정권이 밀리기 시작했다고 인식하며 투쟁에 불을 붙였다. 6.29 선언이 있기까지 12일 동안 매일 150명에서 300명에 가까운 군중들이 광주서현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고 할 정도로 투쟁은 격했다.

 

 

6월 항쟁의 주역, '광주의 해방구' 서현교회 변남주 목사

【광주=뉴시스】 6월 항쟁 당시 광주에는 해방구가 있었다. 거리에 나섰던 학생들과 넥타이 부대의 피난처 이자 쉼터였던 곳. 서울에 명동성당이 있었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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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군의 중상으로 경찰이 무차별로 쏘아대는 최루탄에 반대하는 최루탄 추방 대회가 6월 18일 전국 각 도시에서 열렸다. 이때의 시위 참가자 규모는 150만 명으로 추산되었으며 이에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까지 검토할 정도에 이르렀다.


집권세력은 국민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군대를 동원하여 강경 진압하느냐, 아니면 직선제 개헌으로 항복하느냐의 기로에 봉착하여 실제로 군의 투입을 거의 결정한 단계였다는데 이날 저녁 청와대 안가에서는 심야 대책 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전두환은 이기백 국방부 장관, 각 군 참모총장, 고명승 보안사령관에게 20일 새벽 4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자는 전제 아래 출동 준비를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경찰총수였던 권복경 전 치안본부장은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런 사실을 밝혔다.

 

 

[단독]권복경 前치안본부장 “전두환, 6월항쟁 부산에 軍투입 명령”

1987년 당시 경찰 총수였던 권복경 前치안본부장 인터뷰[동아일보] “각하(전두환 전 대통령)는 1987년 6월 시위대가 부산 거리를 가득 메우자 군을 투입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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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전두환)는 1987년 6월 시위대가 부산 거리를 가득 메우자 군대를 투입해 진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국가가 뒤집힐 수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권복경 치안본부장은 "좀 심각하지만 경찰력으로 책임지고 막겠다"면서 전두환을 설득하여 즉각적인 군 투입은 막았다. 

 

6월 19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이제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계엄령으로 군을 투입하든지, 아니면 물러서서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날 오전 10시 30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옆 회의실에서 군 고위회의가 열렸다. 이는 비상조치를 전제로 한 군대 투입 계획을 세밀히 점검하는 자리였다.

이때 전두환은 다음날 새벽 4시까지 군대가 모두 점령지로 이동하도록 지시하면서 "이것은 계엄령이 아니라 계엄령에 플러스알파를 하는 비상조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군대도 동원할 수 있고 군법 회의도 할 수 있고 정당 해산까지도 가능해요. 안기부 등에서 다 준비가 되어 있지"라고 했다.


이에 따라 군대 투입을 통한 무력 진압을 실시하기로 최종 결정이 났으며 수도권 외곽에 주둔 중이던 충정부대들을 서울 외곽 지역에 집결시켰다. 당시 전차병 출신의 증언에 의하면 이미 출동 준비를 마치고 서울 진입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으며 수방사 소속 병사들 역시 출동 준비를 이미 끝마친 상태였다고 한다. 즉 명령만 내려지면 바로 투입할 수 있게 한 것.

그리고 정부는 청와대 출입 기자들에게 19일 밤 10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할 것이며 이와 동시에 군대를 투입하여 무력 진압으로 소요 사태를 종결할 것이라고 통보하였고 기자들은 이 내용을 본사에 보고하였다. 어쩌면 5.18 광주를 뛰어넘는 상황이, 그것도 수도 서울 한복판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경찰력이 시위 통제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권복경 치안본부장이 어떻게든 경찰력으로 책임지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는 군 투입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발언이었을 뿐, 당시 경찰력의 대응 능력 한계는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서울의 급증하는 시위대를 막기 위해 지방의 경찰력을 계속해서 소환하여 투입했으나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지방의 경찰력 공백만 불러오는 실정이었다.


지방에서의 시위


그리고 지방의 시위는 서울과 달리 과격성을 띠고 있었다. 몇몇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상술했듯이 6월 10일 마산에서 열린 대한민국 A팀과 이집트 간의 축구 경기가 최루 가스 탓에 중단되고 표 환불을 요구하던 관중들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거 시위에 합세하여 1,500명이었던 시위대가 3만 5,000명으로 대거 불어났으며 양덕, 자산동 2개 파출소가 전소되었고 민정당 국회의원 우병규의 사무실이 습격받아 전두환과 우병규의 사진에 대한 화형식이 거행되었다.

 

 

또, 순찰차나 전경 버스 같은 경찰 차량, 안기부 직원의 차량, KBS와 MBC의 보도 차량도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습격받아 전소되었으나, 경찰력은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방어에 급급해야 했다.

 


6월 13일 부산에서는 전방입소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부산수산대, 경성대 학생 천여 명이 부산역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독재 타도", "호헌 철폐"를 외치며 연좌 농성을 벌이고, 지나가던 시민들과 대합실에 있던 시민들이 합세해 1만 명으로 불어났다. 시민들은 인근 상점에서 쭈쭈바를 수십 개씩 사서 시위대 위로 던지며 응원했다. 시위대는 경찰의 진압으로 흩어져 남포동과 서면에서 시위를 계속했다.

 

 

6월 15일, 충청남도 대전시(현 대전광역시)에서는 충남대, 목원대, 한남대, 배재대, 대전대 등에서 학생들이 일제히 교문 봉쇄선 돌파를 시도했고, 병력 대부분을 서울에 차출당한 충남 경찰은 모든 학교에서 방어선이 돌파당했다. 쏟아져 나온 학생들과 이에 합세한 시민들이 대전 도심을 가득 메웠고, 이에 대전 치안당국이 타협안을 제시해 대전역까지의 가두시위를 보장하고 진압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협상에 나선 치안당국 책임자가 온건하다며 처벌받을 일이었지만, 당시 상황이 워낙 급박해서 별다른 일은 없었다.

 

 

"대전 6월항쟁 촉발에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 가두시위도 기여" | 연합뉴스

(대전=연합뉴스) 김소연 기자 = 대전지역 6월 항쟁을 출발시킨 주요 움직임 가운데 하나는 1987년 1월 지역 대학생들이 시내에서 벌인 '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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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6일, 부산에서는 부산대생 5천여 명 등 9개 대학생 1만여 명이 비상 학생총회를 개최하고 시내에서 연합 시위를 벌였다. 대청동 사거리에서 시위대 5천여 명은 충무동 시위대와 합세하면서 남포동 거리를 완전히 뒤덮어버렸고, 시위대는 금방 1만여 명을 넘어섰다. 대중집회를 마친 남포동 시위대는 인근 시청 옆 부산 MBC 방송국으로 향했다. 경찰은 시청 앞을 최후의 저지선으로 삼아 차단했다. 

 

경찰 저지선까지 이동한 시위대는 연좌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평화적 연좌시위도 아랑곳 않고 몇 차례 경고방송과 함께 곧바로 최루탄을 난사하면서 진격했다. 흩어진 시위대는 국제시장과 대청동, 보수동 등지로 나뉘어 시위에 들어갔다. 대청동 사거리에서 폭력진압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던 소규모 시위대는 경찰 진압에 밀려 영선고개 쪽으로 피하다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멈췄다. 

 

이들은 인근 공사장에서 가져온 철근과 벽돌, 시멘트 포대 따위로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이윽고 몰려온 경찰들의 최루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본격적인 투석전이 벌어졌다. 최루탄을 난사하는 경찰은 집요하게 해산을 시도했고,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경찰이 전방위적으로 시위대 해산 작전을 펼치면서 시위대는 고립되기 시작했다. 시위대 중 일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가톨릭센터와 접촉했고, 심각성을 인지한 가톨릭센터가 비상시에 센터 안으로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해 피신하고, 가톨릭센터를 항쟁의 중심지로 만들 것을 결의했다.


6월 16일, 진주에서도 시위대에 의해 파출소 4곳이 공격받아 불탔고, 전경 병력 주둔지였던 한국도로공사 진주지사가 공격받았으며 시위대가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했다.

 

6월 17일, 전날에 이어 시위를 이어가던 진주 경상대 학생들이 남해고속도로로 재차 진입, 도로를 점거하고 LP 운반 차량 2대를 탈취하여 폭파 협박을 하며 진주시내 진입을 시도해 정촌파출소를 불태웠다. 이 초유의 사태에 치안당국도 경악하여 경찰특공대까지 투입, 시위대를 겨우 해산시키고 운반 차량을 재탈환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 시위대가 다시 뭉쳐 경전선 철도를 점거하는 바람에 철도 운행이 일시 중단되었다. 

 

6월 17일, 마산에서는 10일에 이은 대규모 시위가 이어져서 산호 1 파출소, 의창군청, 노동부 마산사무소(현 고용노동부 창원지청 마산고용센터)가 공격받았고 방범초소가 전소되었다.

부산시위의 절정을 이룬 1987년 6월18일 부산 서면에서 시민들이 독재타도와 호헌철폐를 외치고 있다. 이날 시위 참가자는 3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6월 18일, 부산에선 2만여 명의 시위대가 가톨릭센터를 거점으로 집결하여 대청동, 충무동, 남포동 일대를 장악하고 출동한 경찰 병력을 향해 인근 공사장의 철근, 벽돌 등으로 격렬히 저항했다. 이들은 밤이 되면서 '한열이를 살려내라', '독재타도/호헌철폐' 등지의 4.4조 음률의 구호를 외치며 촛불을 들고 범일동 및 좌천동 고가를 향해 전진했다.

 

그러나 좌천동 고가 경찰 저지선에서 최루탄이 무차별 난사되는 중에 회사원 이태춘 씨가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아 다리 밑으로 떨어져 인근 봉생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다. 이 소식에 분노한 시민들은 저지선을 뚫어 KBS부산방송총국을 습격, 화염병을 던져 집기 일부를 파손했으며 밤사이 경찰 저지선을 무너뜨렸다. 이날 서면~범내골 일대에는 30만 명이 운집해 6월 항쟁 최대의 시위가 일어났다.

6월 항쟁 당시 팔호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과 학생들. (사진제공=춘천 6월항쟁 20주년기념사업회)

6월 18일, 춘천에서는 강원대와 한림대를 중심으로 한 대학생 및 시민 1만여 명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시내에서 격렬하게 시위를 벌이며 주요 관공서와 파출소, 방송국 등을 습격했고, 시위가 이어지던 19일 새벽 1시경에는 일시적으로 강원도청을 점거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몇몇 전경 부대는 접전 중에 진압장비 다수를 빼앗겨 시위대에게 불태워졌고, 경찰 차량 몇 대도 전소되었다.

 

 

6월의 불꽃과 함성 - 춘천지역 : 6월의 대투쟁 - 6 10대회에서 6.29선언까지

지금까지 투쟁상황과 확연히 달랐다. 대학들의 투쟁이 점차 격렬해지면서 시위대는 계 속 늘어났고 시민들 역시 적극적으로 시위대열에 동참했다. 6월 18일 이후에는 더욱 거 세지고 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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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9일, 부산에서는 10개 대학 및 3개의 전문대 학생들이 시내로 몰려나와 경찰 기동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진압장비를 탈취했으며, 초량파출소, 남포 1, 2, 3 파출소, 보수 1 파출소, 부산진파출소 등에 방화하고 집기를 파손했다.

 

6월 19일, 대전시에서는 과격 시위대가 탈취한 버스가 대전역 광장에서 휴식 중이던 충남 제2기동대 전경 대열을 덮쳐 전경 1명이 숨지고 2명이 중상을 당했다.

 

6월 19일, 청주에서는 충북대학교생 200여 명으로 시작된 시위가, 최루탄 파편에 유아가 맞아 다치는 등의 일이 벌어지면서 총 1만 명이 넘는 시위대로 크게 불어났다. 이 기세를 타고 청주시청, 민정당 충북당사, 사직경찰서, KBS청주방송총국, 충청일보사 등에 화염병 및 투석 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청주시의 인구는 약 40만 명이니 인구의 2.5%가 시위에 나선 것이다.

 

 

청주 • 충북지역의 6월 항쟁 - 6월 19~21일의 투쟁 : 6월 19일 1만여 명 청주시내 최대 규모의 시위

하지만 6월 19일 시민들의 민주화 열기는 다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19일 오후 4시쯤 충북대생 2백여 명은 교내에서 출정식을 갖고 교문 밖으로 나와 상당공원 쪽으로 진출한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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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9일, 충주에서는 건대생 200여 명을 포함한 시위대 1천여 명이 가두시위에 나서며 KBS충주방송국과 민정당사, 신민당사, 전신국, 용암파출소 등을 공격했다. 충북 경찰 역시 다수 경찰력이 서울로 차출되고 남은 경찰력 중 다수가 청주에 결집한 상황이어서 고작 1천여 명에게 속수무책으로 털렸다. 결국 옆동네인 제천에서 급히 경력을 지원받아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청주 • 충북지역의 6월 항쟁 - 충주 - 4 • 19 이래 최대 인파 민주시위 전개

  충주에서는 19일 밤 9시 30분부터 재야인사들과 건국대생 3백여 명이 2시간 동안 성내동 제 1로터리 주위를 돌면서 촛불행진을 벌였다. 28일에는 건국대생 2백여 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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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일, 19일에 이어 청주에서는 연이틀 연속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KBS 차량을 불태우고 석교파출소를 함락(!)시키고 영운파출소를 전소시켰다. 21일에도 다시 시위에 나서서 3일 연속으로 시내로 나아갔고 19일 공격한 KBS 및 충청일보사를 다시 공격했으며 이후 전경들에 밀려 퇴각하는 와중에도 사창파출소를 공격해 불태웠다. 

 

 

청주 • 충북지역의 6월 항쟁 - 6월 19~21일의 투쟁 : 6월 20일, 21일, 연일 이어지는 성난 군중의 투

6월 20일에도 시위는 계속됐다. 오후 2시 15분쯤 시민들과 충북대, 청주대, 청주사대의 3개 학교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시위 예정을 입으로 전하며 국민은행 앞에 운집하기 시작,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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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1일, 부산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806명이 연행되었다. 이 시기에 부상자가 속출해 부산대 의대·치대, 동아대 의대, 고신대 의대 4학년 생을 중심으로 진료반을 구성해 남포동 국도극장 앞에 고정 진료소를 설치했고, 이동 진료반도 구성했다. 제약사에서는 약품을 트럭 채로 실어 날라 주기도 했다.

 

6월 23일, 제주도(현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연 3일째 가두시위를 벌인 제주대학교 학생 7백여 명이 제주시내 도심지에서 최루탄을 쏘면서 진압하는 경찰에 맞서 투석전을 동반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제주대생들은 중앙로 지하상가 공사장에 세워져 있던 도로포장용 중기 1대를 밀고 나오고 제주시청 소속 제주 7가 1050호 지프를 공격해 전복시키기도 했다. 이후 11시 30분께 지난 22일부터 학생 1백여 명이 농성을 벌이고 있던 중앙성당으로 가 합류했다가, 24일 새벽 학교와 성당 측의 주선으로 연행학생들이 모두 풀려나오자 농성을 풀고 귀가했다.


6월 26일 안양에서는 시위대에 의해 경찰관사와 안양파출소가 공격받아 불에 탔고, 민정당 안양지구당도 마찬가지로 전소되었다. 노동부 안양출장소(현 고용노동부 안양지청)도 사측 편만 든다는 노동자들의 분노가 시위에 담기면서 같이 공격받아 불타올랐다. 그리고 안양 경찰은 패퇴했다.


6월 26일 대구에서는 명덕로터리 2.28 기념탑에서 출발한 시위대가 반월당으로 행진하며 최소 1만여 명 이상이 시위에 참여했고, 밤 10시 40분 민정당 대구 제3지구당(남구, 수성구) 이치호 의원 사무실에 시위 군중들이 난입, 사무실 집기와 유리창 등을 부수고 노태우의 대통령 후보 선출을 알리는 당보를 길거리에서 불태웠다. 파출소 5곳도 습격받았고 그중 3곳이 불에 탔다.

 

 

폭력으로 국민 이기려 한 전두환 헛꿈 '산산조각'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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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치안력의 한계는 명백해졌다. 경찰들은 지방에서 공세적 진압을 사실상 포기하고 행정기관 등을 중심으로 한 거점 방어에 치중해야 했으며, 그조차도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보급받은 최루탄이 바닥나서 전경들이 시위대와 투석전으로 맞대응하는 상황까지 내몰렸고, 각지에서 경찰 부대가 시위대에 압도되어 퇴각하거나 얌전히 항복한 뒤 무장을 해제당하고 쫓겨나는 일마저 줄이었다. 

 

시위가 워낙 대규모에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다 보니, 지방의 시위진압 부대들은 어느 한 도시에 머물지 못하고 열심히 버스 타고 돌아다니며 이곳 막고 다시 이동해서 저곳 막는 등 땜질을 하고 있었다. 지역마다 민정당사, 도청 및 시군청, KBS 방송국, 파출소 등은 제1 공격대상이 되어 화염병과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안 그래도 6월 13일 고건 내무부 장관은 전두환에게 서울의 시위는 현재 치안력으로 진압 가능하지만 시민들이 경찰이 아닌 시위대에 호응, 동조 및 가담하면서 경찰들의 사기가 매우 떨어지고 있다고 보고한 바 있었다. 그리고 시위가 확산되면서 경찰들의 체력도, 사기도 바닥까지 떨어져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최루탄이 바닥나고 있었다. 경악한 당국은 공장을 풀가동했지만 생산량은 소모량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최루탄까지 바닥난다면, 체력과 사기까지 바닥인 경찰은 맨몸으로는 도저히 시위대를 상대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은 군부를 통해 구체적인 병력 동원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6월 17일, 작전명령 제87-4호에 의한 병력 동원 계획이 수립되었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후방을 담당하는 2군이 중심이 되어 각 지역의 위수군단 군단장이 지역별 계엄사령관을 맡으며 부산경남지구와 충남북지구를 특히 핵심 지역으로 설정하였다. 또, 전방에서 4개 사단을 차출하고 특전여단 6개와 해병연대 2개, 그리고 각 군단 직할대인 특공연대 4개를 동원해 서울을 중심으로 부산, 마산, 대전, 대구 등 시위가 거센 곳에 집중 배치하기로 하였다. 육군참모총장 박희도는 철도청과 병력 동원을 위한 열차 수송계획의 협의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 당시 세워진 작전 계획은 다음과 같다.

  • 26사단, 3 특전여단, 해병 2개 연대를 11군단에 배속
  • 9사단을 9군단에 배속
  • 7·11 특전여단을 31사단에 배속
  • 706 특공연대를 39사단에 배속
  • 20사단, 30사단, 1·5·9 특전여단, 701·705·708 특공연대를 수방사에 배속

 

 

‘PD수첩’이 공개한 ‘전두환 쿠데타’ 문건, 직접 보니 더 섬뜩하다  - 고발뉴스닷컴

“‘작전 명령 제 87-4호’, 87년 당시 3성 장군인 민병돈 특전사령관이 직접 박희도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받은 계엄령 문건입니다. 역사적인 ...

www.gobalnews.com

 

 

심지어 항공여단이나 화학부대도 동원하려고 하였다.

무력 진압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시위 지도부에게도 전달되었으며, 시위 지도부는 유혈 사태에 대비하여 비상 연락망을 가동하고 길거리에서 시위하는 시민들 틈에 섞여서 연행당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대비를 하였다.

 

6월 항쟁의 결정적 원인 세 가지

 

1987년 '6월 항쟁'의 결정적 원인 세가지

날짜 1987년 6월 10일 ~ 6월 29일 장소 대한민국 전역 원인 전두환 정부의 독재로 인한 민주 세력과의 묵은 갈등 4.13 호헌조치 발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및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 등 목적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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